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참상의 시작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그곳의 모든 삶을 무참히 파괴했다. 살아남은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극심한 절망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류는 이 끔찍한 참상을 목격한 후 핵무기를 통제하고 폐기하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핵무기 반대 대중운동의 발자취
전쟁 직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핵무기의 위험성을 가장 먼저 자각했다.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 로트블렛, 레오 실라드 등은 1945년 「시카고 핵 과학자 회보」를 창간해 핵무기의 위협을 경고했다. 이들은 이후 「핵 과학자 회보」로 명칭을 바꾸고 대중교육과 캠페인을 이어갔다. 1947년 시작된 ‘지구 종말 시계’는 인류가 핵위협에 얼마나 가까운지를 알리는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림 지구 종말 시계 2025년은 자정 89초 전으로 지구 종말 시계 도입 이후 자정에 가장 가까운 시간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핵공격 위협의 지속, 북한의 핵실험이 자정에 가깝게 시계 초침을 앞당긴 대표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1949년 프라하에서 열린 제1차 평화 지지자 세계대회는 72개국 대표들이 모여 평화와 군축을 논의한 자리였다. 이어 1950년 제2차 대회에서 발표된 ‘스톡홀름 호소문’은 핵무기의 전면 폐기를 요구하며 2억 7천만 명의 서명을 이끌어냈다.
1955년 아인슈타인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발표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은 “인류를 멸망시킬 것인가, 전쟁을 포기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세계의 양심을 흔들었다. 이 선언은 1957년 퍼그워시회의로 이어져 미·소 간 핵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반핵 운동
1945년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은 그곳의 모든 삶을 무참히 파괴했다. 일본 사회 전역에 핵무기에 대한 공포와 반감이 퍼졌다. 1954년 미국이 비키니섬 일대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강행해 일본 어선 제5후쿠류마루 선원 전원이 피폭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의 반핵 정서는 다시 한 번 크게 확산됐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시작한 원폭 반대운동은 도쿄에서 제5후쿠류마루 사건에 대한 항의 연대로 확산되었고, 전국적인 원폭·수폭 반대 운동으로 발전했다. 1950년에는 645만 명이 ‘스톡홀름 호소문’에 서명했고, 1954년부터 시작된 ‘스기나미 호소문’ 서명운동에는 3,158만 명이 참여했다.
“모든 사람들이 수소폭탄 금지를 위해 청원합시다. 전 세계 모든 정부와 국민에게 촉구합시다. 인류의 생명과 행복을 보호합시다.”라는 호소문은 일본 시민들의 뜨거운 열망을 담고 있었다.
그림 그림 2014년 세계 원수폭 금지대회. 세계 원수폭 금지대회는 원수금(원수폭금지 일본국민회의), 원수협(원수폭금지 일본협의회)양대 단체가 매년 행사를 개최하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후 일본의 반핵운동은 세계적 흐름으로 발전했다. 세계 원수폭 금지대회는 일본의 반핵운동가와 국제 평화활동가들이 매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모여 연대를 이어가는 상징적인 자리로 자리잡았다.
또한 일본은 강력한 반핵여론을 바탕으로 1968년 사토 에이쿠 총리의 ‘비핵 3원칙’을 통해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생산하지 않으며, 반입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천명했다. 이는 일본 헌법 9조와 함께 평화주의를 상징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아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대규모 반핵 시위
유럽은 냉전 시기 미·소의 핵 경쟁 한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유럽 전역에서는 핵무기 반대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1958년 영국에서 시작된 ‘올더마스톤 행진’은 핵군축운동(CND)의 출발점이었다. 4일간 런던에서 올더마스톤까지 84km를 걸으며 핵무기 개발 중단을 촉구한 1만 명의 시민들은 핵 없는 세상을 향한 첫 외침을 전 세계로 퍼뜨렸다. 1960년대 이후 CND는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의 지지를 얻으며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1970년대 후반, 소련이 SS-20 미사일을 유럽에 배치하자, 이에 대응해 미국은 퍼싱 II 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을 서유럽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핵전쟁 위험이 현실로 다가오자 유럽 시민들은 거대한 반핵 시위로 응답했다.
1983년, 55만명이 운집한 네덜란드 반핵집회
1982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핵무기 반대 집회에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했고, 독일과 네덜란드에서도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와 "핵 없는 유럽"을 외쳤다. 특히 1983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반핵 집회는 55만 명의 시민이 참여해 정부의 미사일 배치 결정을 연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에서는 같은 해 ‘부활절 행동’과 ‘뜨거운 가을’ 시위로 총 150만 명이 참여하며 역사적인 대중운동을 기록했다.
유럽의 핵군축운동은 단순히 반미나 반소련을 외치는 운동이 아니라, 진영을 넘어 평화와 비핵화를 위한 연대를 구축하는 운동이었다. 유럽 핵군축운동(END)은 “모든 핵무기를 유럽에서 철수시키자”는 목표 아래 서유럽과 동유럽 시민들이 국가 이념과 체제를 초월해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그림 동유럽과 서유럽의 분할을 뛰어넘어 단결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END 포스터
이러한 연대는 미·소 양국의 핵 군비 경쟁에 큰 압박을 가했고, 그 결과 1987년 미국과 소련은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해 아시아와 유럽 전역에서 중·단거리 미사일을 철수하기로 했다. 이는 유럽 반핵운동이 이끌어낸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NPT와 TPNW, 제도적 성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무기의 관리와 통제는 국제사회의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였다. 1960년대 미국과 소련 간의 치열한 핵군비 경쟁, 그리고 여러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 시도로 위기감이 고조되자 국제사회는 새로운 규범을 필요로 했다.
1970년 3월 발효된 핵확산금지조약(NPT)은 핵보유국과 비핵국가가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을 명확히 했다. 이 조약은 ▲핵보유국이 핵무기와 관련 기술을 비핵국가에 이전하지 않을 것, ▲비핵국가는 핵무기를 획득하지 않을 것, ▲평화적 목적의 원자력 이용을 보장할 것, ▲궁극적으로 핵군축을 위해 성실하게 협상할 것 등을 주요 골자로 한다.
현재 191개국이 가입한 NPT는 세계 핵질서를 관리하는 핵심 장치로 자리 잡았으며, 무분별한 핵 확산을 억제한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NPT는 핵보유국의 ‘군축 의무 이행’이 미흡하고, 핵무기의 ‘완전 폐기’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지적된다. 실제로 미국과 러시아는 여전히 전 세계 핵탄두의 90%를 보유하고 있으며, 북한, 인도, 파키스탄 등 비가입국들의 핵무기 개발로 체제의 신뢰성은 위협받고 있다.
그림 ‘폭탄을 금지하라!’ 현수막 앞의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 International Campaign to Abolish Nuclear weapons) 활동가들. 이들은 핵무기금지조약 서명을 이끌어낸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7년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IPPNW, International Physicians for the Prevention of Nuclear War)주도로 결성된 핵무기폐기국제운동은 전 세계 반핵 시민운동의 네트워크로 2010년 핵확산금지조약 평가회의부터 본격적으로 핵무기금지조약의 서명과 비준을 위한 세계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고자 2021년 7월 핵무기금지조약(TPNW)이 발효되었다. 이는 핵무기의 개발, 시험, 생산, 보유, 사용 및 사용 위협을 법적으로 전면 금지하는 최초의 국제 조약으로, 76년간 이어진 반핵 운동의 결실이었다. TPNW는 핵무기의 존재 자체를 인류와 지구 환경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며, 핵 억지론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현재 98개국이 서명하고 73개국이 비준했으나, 핵보유국과 한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는 아직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TPNW는 핵 없는 세상을 향한 국제사회의 의지를 법적으로 구체화한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된다.
오늘의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1983년 네덜란드 핵무기 반대시위 “핵무기 없는 세상: 네덜란드에서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 이후 80년 동안 핵무기가 다시 사용되지 않은 것은, 세계 각지에서 이어진 반핵운동이 ‘핵은 비도덕적 무기’라는 인식을 역사에 새겨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은 NPT와 TPNW라는 제도적 성과로 이어졌다.
202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일본 원폭피해자단체협의회는 ‘핵무기는 결코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핵금기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북한의 핵실험, 핵강대국의 군비 경쟁으로 핵 위협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지구 종말 시계는 자정 89초 전으로, 역사상 가장 위험한 수치를 기록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과거 대중운동이 남긴 발자취를 기억해야 한다. 40년 전 네덜란드에서 울려 퍼진 외침처럼, 오늘 우리는 다시 외쳐야 한다. “핵 없는 세상, 한반도부터!”. 사회진보연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