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의 역사 성찰의 기록> 저자초청 강연회 지상중계
2026년 1월 22일 목요일 저녁 7시 광주 전일빌딩 중회의실에서 『투쟁의 역사, 성찰의 기록: 한국노동운동사 1987~2025』(벽너머, 2025) 출간 기념 저자 초청 강연회가 열렸다. 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광주전남노동안전보건지킴이(준)의 공동주최로 저자 박준형 공공운수노조 부설 교육센터 ‘움’ 사무국장을 초청하여 개최한 이 날 강연회에는 40여 명의 참석자들이 자리를 가득 채웠다.
이날 강연회의 핵심 질문은 명확했다. 한국 노동운동, 특히 민주노총의 과거 30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공식 기념사에서 반복되는 '승리와 진군의 역사'라는 서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박 저자의 주장이었다.
만약 민주노총이 오직 승리만을 거두었다면, 현재 한국 노동운동의 현실은 왜 이렇게 엄혹한가? 왜 여전히 다수의 노동자가 불안정한 위치에 처해 있는가? 이 근본적인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양면성을 직시해야 한다. 진군과 승리의 측면 뒤에 숨겨진 후퇴와 실패를 동시에 보는 성찰의 역사가 필수다. 과거를 단순히 기념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디딤돌로 삼기 위해서는 역사의 완전한 모습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30년, 승리와 진군의 역사 뒷면을 보자
"왜 민주노총 30주년은 조용히 지나갔을까"
강연은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됐다.
"민주노총이 1995년 11월 11일 만들어진 지 작년으로 30년이 됐습니다.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30년이나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도 엄청난 사건이고, 민주노총이 30년 동안 무엇을 만들었는가를 평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그런데 너무 조용히 지나갔어요."
박 저자는 민주노총이 자신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로만 정리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만약 민주노총이 승리만 해왔다고 하면, 왜 우리가 사는 현재 노동 현실은 이렇게 열악한가? 물론 대기업 노동자들은 상황이 좋아졌지만 그건 전체의 20% 이내입니다. 지금도 너무나 많은 투쟁 과제가 있고, 더 많은 노동자가 여전히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며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 역사의 밝은 면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 즉 실패와 한계까지 함께 평가해야 앞으로 무엇을 해나갈지 고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과 경로의존성
박 저자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한국 노동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설명하면서, 그 유산이 민주노총 건설과 이후 경과에서 특정한 경로의존성으로 남아 있음을 지적했다. 기업별 노조 체제의 고착화,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중심 조직, 기존 투쟁 방식의 반복, 사회적 대화에 대한 일관된 전략 부재, 정파 갈등과 내부 분열이 그것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는 위대하긴 하지만, 그 이후 노동운동이 발전한 경로를 딱 고정한 측면이 있습니다. 기업별 노조 체제가 공고화된 것도 87년 투쟁의 결과였고, 대기업과 공공부문 노동조합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도 87년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경로를 만들어 볼 수도 있었던 가능성이 정치적 노동자운동과 지노협(지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으로 이어지던 운동에 있었으나, 95년 민주노총 건설로 이러한 흐름이 일정 부분 단절되었다고 평가했다.
"민주노총 건설은 일반적으로 민주노조 진영의 총집결, 조직 체계의 완성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민주노총 건설은 기존에 사회운동적 성격이 강하던 전노협으로부터의 변화이기도 했습니다. 무엇이 약화되었는가? 이념적 급진성, 투쟁의 전투성, 사회운동적 성격, 정치적 노동자 운동과의 결합이 약화됐죠."
96-97년 총파업은 왜 1년 만에 실패했을까
박 저자는 96-97년 총파업이 민주노총 건설 1년 만에 이뤄낸 영웅적 파업이면서도, 왜 1년 만에 실패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1년 만입니다. 1996~97년 총파업으로 저지한 듯 보였던 신자유주의 노동개혁은 IMF 외환위기로 인해 1년여 만에 재추진되었습니다. 1998년 민주노총도 참여한 김대중 정부의 노사정 위원회를 통해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가 결국 도입됐습니다. 총파업으로 막아낸 것들이 도입된 겁니다."
민주노총이 위기의 '결과'에 대한 투쟁은 조직했지만, 위기의 '원인'에 대한 투쟁을 조직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경제학에 기초를 둔 현실 인식과 비판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제 위기의 '결과'(정리해고와 구조조정)에 대한 투쟁을 넘어 '원인'에 대한 투쟁을 조직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식 역사는 투쟁의 '과정'을 기록하면서, '한계'와 '실패'의 구조적 원인 분석은 생략하고 있어요."
정리해고 반대 투쟁, 비정규직 정규직화 투쟁의 뒷면
박 저자는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치열했던 정리해고 반대투쟁이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고 지적했다. 그 과정에서 중소·영세·특수고용 노동자는 소외되었으며, 정리해고 투쟁 이후 자본의 전략 변화가 노동시장 이중구조 고착화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1998년 8월, 현대자동차 노조는 36일간의 공장 점거 파업을 벌였습니다. 사측의 1,538명 해고 요구를 277명으로 축소시키는 성과를 거뒀지만, 133명의 구내식당 여성 노동자들은 전원 정리해고-외주화됐죠. 이후 자본은 전략을 바꿨습니다. 정규직 정리해고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정규직 채용을 최소화하고 외주화, 하청화, 비정규직을 확산시켰어요. 이것이 노동시장 이중구조 고착화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2000년대 이후 불법파견투쟁,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등 활발한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 평가하면서, 대부분의 비정규직 투쟁이 '정규직 따라잡기'가 가능한 상용형 비정규직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조직화와 투쟁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투쟁의 대부분이 '정규직 따라잡기' 모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따라잡기가 불가능한 불안정 노동자들은 어떻게 조직해야 했을까요?"
다큐멘터리 <밥·꽃·양> (2002) 1998년 IMF 외환위기 속에서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중 해고된 144명의 식당 여성 노동자들의 3년간의 투쟁 기록. 투쟁의 '꽃'이었다가 정리해고의 희생 '양'이 되어버린 '밥' 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산별전환과 사회적 대화의 표류
박 저자는 산별노조 전환이 형식과 실질이 괴리되어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2000년대 산별전환을 통한 조직 형태의 전환은 의미 있었으나, 산별교섭 구조와 산별 노사관계 구축은 실패했습니다. 산별노조로 전환했으나 교섭은 여전히 기업별입니다. 2004년 보건의료노조 산별협약 시도는 내부 반발과 조직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대기업 노조는 기업별 이익 극대화를 선택했죠. 2010년대 초반 대부분이 한계를 실감했지만, 전략 전환은 부재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시도들도 있었음을 언급했다.
"물론, 이러한 사례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소영세 업종-지역에서 초기업 교섭을 확대하고, 화물/건설/라이더 등 특수고용에서 새로운 시도가 있었으며, 금속/보건/공공 등 산별노조의 새로운 전략 실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박 저자는 사회적 대화가 민주노총에서 표류하고 있는 현실도 지적했다.
"사회적 대화에 대해서는 1998년, 2005년, 2020년 모두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고 위원장이 사퇴하는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조직 내 탄탄한 합의가 먼저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했지만, 동시에 이런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앞으로도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내부 이해관계 분화와 조율 실패, 그리고 1998년 트라우마가 경로 의존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한 순환의 마감
박 저자는 민주노총이 산별노조 전략과 동시에 시도했던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 전략도 한 순환을 마감했다고 평가했다.
"민주노총 건설 이후,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라기보다는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라는 성격이 강해졌습니다. 점차 조직 노동자 중심의 협소한 대표성에 갇혔고, 2010년대 민주노총이 주도하고 진보정당도 동참한 '반보수전선'은 결국 위성정당으로 귀결됐습니다. 1998년부터 시작된 민주노총 중심의 정치세력화 운동도 한 순환이 끝난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 당시 민주노총에 대한 평가도 냉정했다.
"민주노총은 '반보수전선'의 연장 속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정부'라는 인식 속에서 근본적인 구조 변화를 요구하지 못했죠. 문재인 정부의 실패는 민주노총의 실패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문재인 정부하에서 부침을 겪었던 비정규직 제로 공약, 최저임금 대폭 인상, 전태일법 등은 민주노총의 요구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의 30년, 성찰을 디딤돌 삼아 나아가자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자
박 저자는 노동운동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변화가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특히 민주노총 30년 동안의 주요 전략이었던 양날개론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산별노조 구축과 정치세력화라는 두 개의 날개로 비상하려던 전략은 경제 위기 속에서 그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산별전환은 형식적 성과에 머물렀고, 정치세력화는 조직 노동자 중심의 협소한 대표성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현재의 노동 현실은 이 두 전략이 상정했던 조건과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대기업 중심의 노동운동으로는 80%의 노동자들에게 닿을 수 없어요.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합니다. 민주노총은 1990년대 장기 경제 성장이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에는 늘어나는 일자리와 임금 수준 상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좁아지는 대기업-정규직 일자리, 청년 일자리 부족과 불안정화, 플랫폼 노동과 특수고용의 확대, 저성장의 지속이라는 완전히 다른 조건입니다."
주변에서 이뤄지는 시도를 주목하자
그는 주변에서 이뤄지고 있는 노동운동에 대한 이해와 집중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화물연대, 건설노조, 라이더유니온으로 대표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투쟁, 중소영세 업종에서의 초기업 교섭 시도, 지역 단위 연대 투쟁들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전략으로는 조직할 수 없는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있으며, 기업별을 넘어선 초기업적 연대를 실현하고 있어요. 1985년 구로동맹파업이 보여주었던 지역 기반의 연대, 전노협이 추구했던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의 유산이 현재의 조건 속에서 보여 지고 있는 것이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자
박 저자는 참석자들에게 역사에 비추어 스스로에게 여섯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고 제안했다.
"우리 노조는 비정규직·하청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 우리는 '모든 노동자'를 대변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조합원'만을 대변하고 있는가? 산별노조의 '실질적' 기능은 무엇인가? 투쟁의 '성과'만 기억하고 '실패'는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40년, 30년, 20년 전과 달라진 지금의 조건을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의 전략은 20년 전과 무엇이 달라졌는가? 불편하더라도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고민해야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기념을 넘어 성찰로 나아가자
약 2시간에 걸친 강연을 마치며 박 저자가 남긴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무겁다. 과거는 걸림돌이 될 수도,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30년의 성과에 취해 과거의 방식을 되풀이하려 하면 그것은 각주구검의 오류가 된다. 그러나 과거의 실패와 한계까지 성찰하고 지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전략을 세운다면, 그 과거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든든한 디딤돌이 된다.
민주노총 과거 30년의 '승리와 진군의 역사' 기념을 넘어, 앞으로의 미래 30년을 위한 성찰로 나아가자는 요청은 단순한 역사 평가를 넘어 한국 노동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역사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솔직한 자문이 이뤄질 때, 한국 노동운동은 비로소 어제와는 다른 내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기념을 넘어 성찰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역사는 교훈을 주기는 하지만 쉬운 답은 없다. 노동자운동이 선 자리에서 다른 미래를 위해 다시 출발할 수 있다면, 한국의 노동자운동을 어제와는 다른 내일로 바꿔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 『투쟁의 역사, 성찰의 기록』(벽너머, 2025) 중에서)











